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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큰스님 12

포교국장스님 | 2010-09-06 | 조회수 : 543

동산 큰스님

 

 

수행자 본분사 가르친 대선사

1965년 4월 입적

주시경에 한글교육 받아

성철-광덕 등 제자 육성

철저한 지계정신 강조

 

 

 

“인간의 身病은 의술로 어느 정도 치료한다지만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다스리겠소?”

조선총독부가 세운 의학전문학교의 졸업을 목전에 둔 청년은 용성 스님으로부터 이

 질문을 받자 말문이 막혔다. 이 ‘마음의 병’을 어찌해야 하나. 결국 청년은 인간의 몸을

고치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자신의 화두가 된 ‘마음의 병을 고치는 법’을 찾아 출가를

 결심한다. 이것이 한국 근현대 불교의 주춧돌을 세운 대선사 동산스님(1989~1965)이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계기이다.

 

 

 

스님은 1890년 2월 25일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상방리에서 정경운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본명은 동규였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된 시기에 소년시절을 보낸 스님은 익명보통학교에서 주시경 선생으로

부터 한글 교육을 받았고, 이는 후일 스님이 불교 번역사업에 특별한 정성을 쏟는 계기가

되었다. 경성 중동중학교를 거쳐 총독부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스님은 위창 오세창 선생의

권유로 용성 스님과 자주 친견하게 되었고 스님의 가르침을 좇아 결국 금정산 범어사로 입산

출가하게 된 것이다.

 

 

 

스님은 1929년 범어사 조실, 1936년 해인사 조실, 1955년 조계종 종정 등을 거치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스님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위로는 용성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아래로는 전

조계종 종정 성철, 불광사 창건주 광덕, 쌍계사 조실 고산, 동산반야회 회주 무진장, 현

범어사 조실 지유 등 기라성같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한국 현대불교사에 있어서 동산 스님의 역할이 무엇이며, 그의 역할이 얼마나 컸던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용성의 제자, 성철의 스승, 정화불사의 주역이라는 수식어를 넘어서

동산 스님이 남긴 가장 큰 족적은 전 생애에 걸쳐 완벽한 수행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마치 일상생활이 기계와 같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스님은 60여년의 수행 생활을

하루처럼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적하는 날까지 아침 저녁 예불에 빠지는 일이

 없었으며, 아침이면 제일 먼저 빗자루를 들고 도량을 청소하고, 빗자루를 정리하는

 일까지 몸소 맡을 정도였다. 또한 철저한 지계정신으로 평생을 엄격한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다.

“모름지기 공부하는 사람은 戒行을 깨끗이 해야 한다. 계를 우습게 알고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이 더러 있다. 분명히 말하건대 부처님이 그렇게 행한

일이 없고 조사 또한 그렇게 행한 일이 없다.”

후학들에게 늘 이 말을 당부하던 동산 스님은 이러한 지계 정신을 지키기 위해

정화불사의 최전방에서 서서 한국불교의 기틀을 새롭게 마련했다.

스님은 65년 4월 입적했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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