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 종신 수도원을 휴휴정사(休休精舍)라 이름지음 남자들의 수선 정진이 이어져 근래까지 운영되다 지금은 문을 닫은 상태 9명의 입방자 : 김지효, 손성와, 이각우, 최평중, 임도만, 오청전, 양만화, 윤철수, 이광제 스님 종신 수도원을 개원하여 9명의 스님이 입방 범어사 대웅전 좌측으로 빠져나가 팔상전 뒤에 있는 극락전 공간으로 사방으로 담을 치고 외인의 출입금지 일미(一味)스님은 이 종신 수도원 개원에 대해 '뜻있는 스님들의 수행정진을 위해 미력이나마 있는 힘을 다해 오도적 삶이 꿈틀거리는 선원으로 성장시켜 혜맥을 이을 도량이 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함 1억원을 들여 극락선원을 중창
1970년대
주지 지유(知有) 스님이 취임하여 "강원과 선원이 경영 합리화와 인재육성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주장
1960년대
금어선원 상량식을 거행하면서 주지스님은 "퇴락한 범어사의 모습을 일산하여 선의 근본도량으로 만들겠다"는 의견을 피력 2개의 보통선원과 하나의 특별선원, 비구니 선원, 연구원 등 5개의 선원이 운영
1950년대
하안거 때는 수선 대중이 100여명씩이나 운집해 선원에서는 식량이 모자라 동래군청에서 배급받아온 국수와 옥수수죽으로 겨우 끼니를 연명해 가면서 정진 원래는 종무소에서 선원에 20명 분의 식량만 공급하기로 했는데 당시 조실 동산 스님이 그렇게 평등 자비한 무차회상을 베풀었던 것 6.25 동란이 발발하자 많은 납자들이 범어사로 들어와 금어선원은 결제, 해제 없이 납자들로 가득 참
1940년대
범어사에는 금어선원을 비롯하여 내원암 선원, 원효암 선원에서는 납자들의 정진 열기로 가득
1930년대
성철 스님이 금어선원에서 하안거, 원효암 선원에서 동안거를 지냄 범어사 금어선원에서는 기석호(寄石虎)스님이, 내원암 선원에서는 권일봉 스님이 조실로 앉았으며 각각 15명, 21명의 납자가 정진 범어사 선원 동안거 대중수는 78명으로 전국선원 중에서 가장 많은 납자들이 수선 안거 당시 범어사 내에서는 범어사 선원, 내원암 선원이 운영되었으며 조실은 권일봉(權一鳳) 스님
1920년대
안거결제를 하면서 동산(東山) 스님을 조실로 모심 동산 스님을 조실로 모시는 데에 힘을 기울인 사람은 성월 스님 성월스님은 독립운동과 사회계몽운동에 전력하기 위하여 주지직을 다른 스님에게 위임 성월 스님의 역량은 범어사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끼침
1910년대
선찰대본산으로 확정되어 많은 참선인과 도인을 배출 실로 20세기 초에 9개의 선원이 범어사에서 운영 범어사가 한국불교 선종 수사찰로 인정 '범어사내원선원청규(梵漁寺內院淸規)' 제정 금어선사(金魚禪社)가 범어사 내 개설(발기인 : 성월 스님) 선학은 우리 종문의 혈맥이며 골수이며 성명(性命) 선을 통해서 달관하며 선을 통해서 견성하고 선을 통해서 성불에 이를 수 있다 원응당에 있던 선원을 금당으로 이전 범어사 각 전각과 암자에서 선원이 계속 운영
1900년대
범어사 안심료(安心療), 원응당(圓應堂), 승당(僧堂) 등에 선원 개설 대성암에 대성선(大聖禪社)가 개설 (참선대중 16인) 회현석전(晦玄錫佺) 스님이 중심 된 23인의 선객이 모여 원효암에 원효선사(元曉禪社) 개설 계명암에 청설된 선원을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성월 스님을 원주로 삼고 내원암으로 이전(회중19인) 한국 근대 선풍을 드날린 경허 스님이 계명암에 와서 <범어사 계명암창설선사기(梵漁寺 鷄鳴庵創設禪社記>를 씀 9항목의 <범어사계명암수선사청규>제정 계명암에서 총섭(摠攝) 스님을 비롯하여 17인이 모여 계명선사(鷄鳴禪社) 개설 내원선사(內院禪社)가 선문을 열음 안양선사의 발기인은 의룡보우(義龍普宇) 스님 대중은 의룡, 천원각환, 원중, 덕수 스님 내원선사의 발기인은 혼해찬윤 스님 범어사에 금강선사 개설을 시작으로 안양암에 안양선사가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