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 스님은 흔히 낭백수좌(浪伯首座) 혹은 만행수좌(萬行首座)라고 불린다. 일찍이 범어사에 출가하여 부지런히 수행하였으며, 특히 보시행을 발원하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남을 위하여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스님에게 특기할 만한 일은 커다란 원력을 세워서 생을 거듭하면서까지 그 원력을 이룩한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가 전하여 지고 있다. 이 나라에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융성하던 불교가 쇠망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의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이 빚은 불교의 폐해는 필설로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 조선 중엽에 이르러 불교의 박해는 그 극에 달하는데, 승려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일개 사찰에 부여된 부역의 수가 무려 30종에서 40종에 이르렀다고 하는 기록이 전한다. 종이, 붓, 노끈, 짚신, 새끼, 지게 등 그리고 특수 곡물 등 온갖 농작물에 이르기까지 범어사에 철마다 부여된 부역의 수만도 36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무렵의 승려들은 자신들의 공부는 전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일생을 나라에서 부과된 부역에 종사하기도 바쁜 나날이었다. 낭백 스님은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뼈아프게 개탄하시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부역만은 면하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설사 금생에 안되면 내생에라도 부역을 면하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하리라 마음먹고 원력을 세웠다. "금생에는 복을 많이 지어서 내생에는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리라. 그리고 그 관리의 특권으로 범어사 스님들의 부역을 혁파하리라." 하고 그 날부터 힘이 닿는 대로 복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의 기찰 부근 그러니까 동래를 들어가고 나가는 길목 큰 소나무 밑에 샘물을 파서 행인들의 식수를 제공하고, 넓은 밭을 개간하여 참외, 오이, 수박 등을 심어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무한정 보시하였으며, 그런 여가에 짚신을 삼아서 모든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신을 보시하는 등 온갖 일로써 많은 사람을 구제하시다가 마지막 늙은 몸뚱이까지도 보시하고자 돌아가실 때에는 범어사 뒷산 밀림 속에서 삼일동안 헤매다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히는 바 되었다고 한다. 스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스스로 숙명통(宿命通)을 못하였으므로 세 가지의 증명할 일을 남겨 놓기로 하였다.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어 올 때에는 모든 관리가 다 일주문 앞에서 말에서 내리는데 자신은 어산교 앞에서 내리겠으며, 자신이 쓰던 방을 봉해 두었다가 스님 스스로가 열 것이며, 사찰의 어려움을 물어서 해결할 것을 약속하리라 라는 것이었다. 스님이 돌아가시고 비슷한 연배의 스님들도 다 돌아가시고, 그 제자되는 스님들도 이미 늙었으나 낭백 스님의 그 눈물겨운 원력이 성취될 날만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느 날, 중앙의 순상국(巡相國)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내는 관리가 온다는 전갈을 받고 범어사 스님들은 언제나 지방관리가 와도 그러했듯이 주지스님 이하 모든 대중들은 어산교까지 나가서 행렬을 지어 부복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 관리는 반드시 일주문까지 말을 타고 올라가는 상례를 깨고 어산교 앞에서 말에서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찰을 자세히 돌아본 뒤 수 십 년 동안 봉해둔 낭백 스님의 방 앞에 와서는 기어이 문을 열라하여 봉함을 뜯고 열어보니, 개문자시폐문인(開門者是閉門人)이란 스님의 친필유묵이 몇 십년의 세월 속에 얼룩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지 스님의 차대접을 받으면서 사찰의 어려움을 묻고 36종의 부역을 혁파해 줄 것을 약속하고 돌아가서 그 즉시 동래부사에게 명하여 시행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그 증거로써 지금 어산교에서 500∼600m 정도를 아래로 내려가면 옛날에 사용하던 길옆에 몇 개의 비석이 있는데 그 중에서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嚴革祛寺弊永世不忘壇)'이라는 비가 그것이다. 순상국 조공은 스스로 낭백 스님의 후신이라고 한 일은 없다. 그러나 그 분은 낭백 스님의 원력을 성취시킨 사람이므로 낭백 스님의 환생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