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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큰스님 13

포교국장스님 | 2010-09-11 | 조회수 : 486

동산혜일(東山慧日)

 

나날이 좋은 날

 

 

 

어느 해 여름 안거 때 나는 범어사에 있었다. 장마가 지루했다.

그 때 범어사에는 2백명 가까운 대중이 여름 안거를 하고 있었다. 안거기간의 중간을 지날

무렵이었다.

3개월 동안의 안거기간 중 한달 보름까지를 절에서는 흔히 반산림(半山林)이라고 한다.

이 반산림이 지날 무렵에 절의 식량사정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 때는 지금과 같이 절구경을 오는 사람이 관람료를 내는 때가 아니었으므로 절의 주된

수 입은 절이 가진 논에서 나는 소작료(小作料)였다.

때문에 가을 추수 되에는 절살림이 그런 대로 지낼 만하지만 겨울을 지내고 봄에 이르면

살 림이 쪼들리기 시작하고 여름 안거의 반산림에 이르면 사정은 매우 나빠진다. 1970년대까지,

벼를 수확하기까지 절량농가가 생기고 전국적으로 식량의 절대량이 부족해서 주민의 대다수가

 굶주려야 하는 보릿고개가 있었듯이 절에도 보릿고개가 있었다.

범어사의 경우, 식량 사정이 어려운 고비를 동산 스님을 따르는 신도들의 보시로 이겨내곤

하였다. 그런데 식량 사정이 어렵다는 소식을 들은 신도들의 보시 중에는 국수가 많았다.

그것은 조실(祖室)인 동산 스님께서 국수를 특별히 좋아하시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쌀은

넉 넉하지 못해도 국수는 늘 풍족하였다.

 

 

 

그래서 식량사정이 어려운 때에 신도들이 마련한 대중공양은 으레 국수 공양이었고

국수공 양이 잦으면 식량 사정이 나쁜 것으로 대중은 알았다.

한편 그 무렵에는 안거 때면 신도들도 적잖이 안거에 동참을 했는데 그해의 범어사 여름

안 거에는 20명 가량의 보살들이 동참을 했었다. 이 보살들 가운데 절의 식량사정이 어렵다는

 말을 들은 한 노보살이 집에 다녀오면서 역시 국수 여러 상자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동산

스님께 하는 말이 이러했다.

이 노보살의 큰 아들은 동래에서 국수공장을 하고 있었다. 그 때의 국수공장은 젖은 국수발 을

노천에서 말리는 소규모의 가내수공업(家內手工業)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비가 오면 국 수를

 말릴 수 없으므로 공장을 쉬어야 했다. 그러니 오랜 장마에 일을 쉰 큰아들의 살림 형 편은

 어려울 밖에 없었다. 절의 식량사정이 어렵다 해서 큰아들을 찾아갔으나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둘째아들은 국제시장에서 우산과 비신 따위를 파는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오 랜 장마로 장사가 잘 되었다. 노보살은 이 둘째아들에게서 돈을 얻어 국수를 사왔다고 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비가 오면 큰아들이 걱정되고 날이 좋으면 둘째아들이 걱정이라 걱정이 떠날 날이 없다 하면서 날씨를 원망하였다. 참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숨김 없이 드러난 말이었다.

헌데 이 말을 들은 동산 스님께서 "옛날, 어떤 노파에게도 보살과 같이 두 아들이 있었지 한 아들은 나막신 장사를 하고 한 아들은 짚신 장사를 했는데 비가 오면 짚신 장사하는 아 들이 가여워서 울고 날이 좋으면 나막신 장사하는 아들이 마음에 걸려서 울고,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네. 그러나 생각을 한번 바꾸면 조금도 울 일이 없어요. 비오는 날은 나막 신 파는 아들 생각하고 맑은 날에는 짚신을 파는 아들을 생각하면 나날이 좋은 날이 아니겠 는가. 도리어 날씨를 고마워 해야지."하셨다.

스님은 노보살에게 한 생각 바꾸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고착관 념(固着觀念)을 깨뜨릴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슬픈것에 얽매여 있지 말고 밝고 기쁜 것을 보라는 것이다. 발상(發想)을 전환해서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자식의 기쁨은 어머니의 기쁨이다. 자식의 슬픔 또한 어머 니의 슬픔이다. 이것이 모성애이다. 어머니에게 자식의 기쁜 것만을 보라는 것은 무리한 일 이다. 오히려 기쁨 보다는 슬픔이 더 강렬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법이다.

 

 

 

범부에게 있어서 아픔은 쾌감보다 짙고 슬픔은 기쁨보다 뿌리가 깊다. 그래서 범부는 기쁨 과 즐거움보다도 아픔과 슬픔을 더 오래 기억한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가슴에는 자 식이 느끼는 아픔과 슬픔이 배가(倍加)해서 각인된다. 그런데 스님은 한 생각 바꾸라 하신 다.

노보살이 스님의 말씀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 수 없으나 깊게 합장을 하고서 물러갔다.

'나날이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라고 하는 말은 중국 선종(禪宗) 가운데 하나인 운문종(雲門宗)을 개창한 운문 문언(雲門文偃) 선사가 즐겨 쓰는 말로 화두(話頭)의 하나이다.

운문선사는 어느 날, 상당(上堂)에서 대중을 향하여 "그대들이게 15일이전은 묻지 않겠다.

그러나 15일 이후에 대해서는 한 마디를 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리고 잠시 뒤, 스스로 대중 을 대신해서 하는 말이 "나날이 좋은 날이다."하였다.

여기서 운문 선사가 보름 이전이라 하고 이후라고 한 말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잘 못을 저지른 아이에게 "지금까지의 잘못은 따지지 않겠다. 그러나 앞으로의 네 행동을 지켜 보겠다. 그러니 앞으로의 네 각오를 말하라."하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 에 함정이 있다. 15일 이전은 묻지 않으나 15일 이후에 대해서 한 마디 하라고 윽박지른 다 음, 곧 이어서 대중을 대신해서 "나날이 좋은 날이다." 한 것은 운문 선사가 파놓은 함정이 다. 이 함정에 빠지면 15일 이후를 나날이 좋은 날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운문 선사는 그 함정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정월 초하루 상당해서 "해마다 좋은 해요, 나날 이 좋은 날이다. 어찌 새것이 있고 묵은 것이 있다 하겠는가." 하였다. 이로써 15일 이전은 물론 15일 이후까지를 운문 선사가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헛되이 지나간 과거에 얽 매이거나 또한 아직 오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에 희망을 걸고서 허송세월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항상 그날 그날을 적극적이며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곳에 '나날이 좋은 날'이 이 루어지는 것을 이 공안(公案)은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태도를 불교도의 바른 생 활태도라고 선지식(善智識)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그러한 생활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는 이야기 한 토막.

중국 천동산(天童山) 경덕사(景德寺)에 한 이름 없는 노승이 있었다. 한 여름의 뙤약볕 속에 서 허리가 활처럼 구부러진 노승은 표고버섯을 말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관인(官人)이 노승 이 가여워 나이를 물었다. 노승은 예순 여덟 살이라고 대답했다. 관인이 노승에게 말하였다.

"그런 일은 젊은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노승 왈, "남(他人)은 내가 아니지요."라고 하였다.

 

 

 

남이 한 일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관인은 노승이 안쓰러워서 말했다.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굳이 노구(老軀)에 뜨거운 뙤약볕 속에서 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 까?"

노승, "표고버섯은 해가 쨍쨍할 때 말려야 합니다. 이 때를 놓치면 어느 때 말립니까?" 하였 다. 동산 스님께서 노보살에게 한생각 바꾸면 나날이 종은 날이 된다고 하셨는데 노보살이 동상 스님에게 깊이 합장을 하고 물러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노보살이 물러간 뒤, 옆에서 자초지종을 지켜본 한 수좌가 "스님, 말은 쉬워도 실제로 생각을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까?" 하였다. 이에 동산 스님께서 "백척간두 (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라."하셨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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