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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고승

동산큰스님

범어사 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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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수행 - 出家修行

동산큰스님

서기 1912년 23세

일제가 강점한 후 총독부에서는 民事令, 刑事令, 不動産登記令 등등 각종의 令을 공포하여 국민들을 꽁꽁 묶었다. 불교에도 禪宗 兩宗 宗務院이다, 31本山 住持總會 등으로 그간의 관습과 전통은 말살하고 불교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어서 마음대로 다스리려고 하던 때이다. 스님은 드디어 경성총독부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10월 용성 큰스님의 지시로 金井山 梵魚寺로 出家를 한다. 나라는 일본에 빼앗겼는데 앞으로 이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의식있는 젊은 청년으로서는 여간 착잡한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병고를 치료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수년간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韓日合邦이라는 恥辱을 당하고 갖가지 악법으로 한국국민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획책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과연 자신이 닦은 의학은 제대로 펼칠 수 있을까? 인간의 탐욕으로 저질러지는 그 많은 難題들의 근본적인 해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스님으로서는 너무나 벅찬 문제들이 현실에 山積해 있음을 알고 묵묵히 용성 큰스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根本問題를 해결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이 해는 비록 뒷날 알게 된 일이지만 鏡虛 스님께서 저 멀리 삼수갑산에서 아무도 몰래 入寂하신 해이기도 하다.

서기 1913년 24세

범어사에 遺傳하고 있는 同戒錄에 의하면,
世尊應化 2940년(서기 1913년) 癸丑 3月 15日
제7회 金剛戒壇
三和尙
傳戒大和尙 惺月一全
摩阿 梨 松月臨水
敎授阿 梨 道峰本然 .


이하에 七尊證師 스님들과 維那와 引禮가 소개되고 比丘同戒 第七壇에 큰스님의 法名인 慧日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다른 기록들과 모두 일치하다. 큰스님은 이와 같이 만물이 蘇生하는 春三月 보름에 禪刹大本山 梵魚寺 金剛戒壇에서 용성 스님을 恩師로 하고 惺月 和尙을 戒師로 하여 受戒하였으니 法名은 慧日이고, 法號는 東山이다. 스님은 다행히 受戒하던 해에 大乘經典부터 修學할 수 있게 되어서 佛法에 숙명적인 인연이 있음을 가슴으로 깊이 느낀다. 마침 여름안거가 시작되는 4월 15일부터 범어사 講院에서 {楞嚴經}을 修學하였던 것이다. 한편 용성 스님께서는 長城 白羊寺 雲門禪院의 組室로 계시었다. 그래서 스님은 스승의 가르침을 친히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운문선원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운문선원에 온 스님은 10월 보름 結制日부터 용성 스님에게 {傳燈錄}, {拈頌}, {梵網經}, {四分律}을 수학하였다. 일찍이 四書三經 등 한학과 현대학문을 이수하였고 {楞嚴經}까지 공부한 스님으로서는 짧은 기간에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 해는 마침 용성 스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저술하신{歸源正宗}이 발행되던 때이다.

서기 1914년 25세

기록에 의하면 스님께서는 發心出家하여 출세간의 奧義를 밝히려면 수많은 선지식들을 參訪하여 見聞을 넓히는 것이 옳은 일이라 여겨 당시 큰 善知識인 漢巖 禪師를 찾아갔다. 한암 스님은 평안남도 맹산군 牛頭庵에서 安居 中이었다. 한암 선사를 찾아가서 다시 {楞嚴經}과 {起信論}과 {金剛經}과 {圓覺經}을 修學하였다. 다음해인 을묘년까지 2년에 걸쳐 四敎料 전체를 공부하였는데 스님은 이때 특히 {圓覺經}을 잘 배워서 감명이 깊었으며 깨달은 바가 많았다고 몇 차례 말씀하셨다.

서기 1916년 27세

한암 스님에게 四敎와 禪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 뒤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서 출가본사인 범어사로 돌아왔다. 범어사에 돌아오니 마침 永明 大講伯이 계셔서 大敎料인 {華嚴經}을 수학하게 되었다. 大敎料를 2년 동안 철저히 공부하여 이듬해인 정사년에 修了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