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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고승

동산큰스님

범어사 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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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신상주-法身常住

동산큰스님

서기 1963년 74세

스님은 노령에도 불구하시고 범어사의 수계법회와 마산 포교당에서의 보살계 법회를 주관하시고, 불국사에서 태국의 僧正 스님과 총무원장 스님을 맞이하여 그들에게 선지를 선양하기도 하였다. 스님께서 태국 僧正 스님에게 다보탑 전의 석사자를 가리키며 이르기를,
"저 사자를 보십니까?"
"네 봅니다."
"그 소리를 듣습니까?"
"....?"

"내가 당신네 나라에 갔을 때 후한 대접을 받았는데 오늘 답례로 선사할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여 한국 선불교의 인식을 새롭게 하여 주셨다. 스님은 이 해에도 강진의 백련사로 가셔서 잠깐 주석하시다가 돌아왔다. 이 해에 출가 반백년을 생각하셨던지 문득 아래의 글을 남겼다.

五十年來畵猫樣(오십년래화묘양) 오십년 동안 고양이의 모양을 그렸더니
今日分明活猫兒(금일분명활묘아) 금일에야 분명히 살아있는 고양이로다.
芳草岸頭留不住(방초안두유불주) 아름다운 풀 언덕에 머물지 않고
夜來依舊捉老鼠(야래의구착노서) 밤이 되면 여전히 늙은 쥐를 잡는다.

서기 1964년 75세

4월 22일, 梵魚寺의 普濟樓를 중수하여 落成하고, 이어서 일주문과 천왕문을 중수하고 경내의 參拜路 등을 정비하는 등 寺宇를 쇄신하였다. 그 때의 天王門 중수기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三界唯心 一心之中 何有盛衰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年年好年 月月好月 日日好日 時時好時 何有揀擇 大韓民國甲辰年 六月日始役 同八月日竣工 日日有天上之慶 時時無百害之災 夫復何求

時住持 釋東山 慧日 謹識

삼계는 오직 마음이니, 한 마음의 가운데 무슨 성쇠가 있겠는가? 천겁을 지나도 예스럽지 않고, 만세에 걸쳤으나 항상 오늘이네. 해마다 해마다 좋은 해, 달이면 달마다 좋은 달, 날이면 날마다 좋은 날, 때마다 때마다 좋은 때이니, 무슨 간택이 있으리요. 대한민국 갑진년 6월 일 처음 일을 시작하여 같은 해 8월 일에 준공하였다. 날이면 날마다 천상의 기쁨이 있고, 때마다 때마다 온갖 재앙 없음이니,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5월 22일에는 서울 안양암에서 보살계를 전수하였다. 그리고 6월 14일에는 충북 속리산 법주사에 건립된 미륵불입상 중수불사 점안식에 證師로 참석하여 설법하였다. 스님은 속리산에 가신 김에 중사자암에서 3일, 복천암에서 1일을 머무시면서 속리산 곳곳을 돌아보시고 범어사로 돌아왔다. 7월 2일에는 수원 포교당에서 全觀應 스님과 함께 보살계의 수계법회를 가졌다. 8월 29일에는 부산항의 출입선박의 안전항해를 기원하여 대선조선공사내(영도)에 건립된 十一面觀音菩薩像 점안식에 證師로 참석하여 설법하였다.

동산큰스님

서기 1965년 76세

3월 15일 스님으로서는 마지막이 된 범어사 금강계단 제65회 보살계산림을 맞이하여 3일간을 계속하여 설법하였다. 회향일에 즈음하여 계단을 당시 교수 화상이었던 석암 스님에게 전수하시고 " 이 자리에 다시는 오르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였다. 3월 20일에는 부산 온천장에 있는 금정사의 방생법회를 주재하시고 설법하였다. 3월 23일(陰). 스님은 이날도 평일과 다름없이 대중들과 함께 새벽 예불을 드리고, 금어선원에서 정진하시고, 도량청소도 빠지지 않았다. 점심공양을 드신 후 약간 피로한 기색을 보이더니 제자들 몇 명을 불러놓고 종단의 앞날을 염려하시면서 "放逸하지 말고 부디 精進에 힘쓰도록 하라."고 하시고, 아래의 글을 남겼다.

元來未曾轉(원래미증전) 원래 일찍이 바꾼 적이 없거니
豈有弟二身(개유제이신) 어찌 두 번째의 몸이 있겠는가.
三萬六千朝(삼만육천조) 백년 3만 6천일
反覆只這漢(반복지저한) 매일 반복하는 것, 다만 이놈뿐일세.

오후 6시 무렵 스님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누우시더니 영원한 寂靜三昧에 드시었다. 스님은 涅槃에 드시는 그날까지 예불과 운력과 정진에 참여하시는 생활로 일관하셨으나 열반의 모습이 특이하지 않았다. 지극히 평범하시고 다만 조용히 건강하신 채로 눈을 감았다. 스님께서는 평소에 스스로 涅槃의 진실에 대하여 이렇게 법문하였다.

…중 략…
세상의 여느 凡夫 中에도 한 三昧를 이루면 滅後에 舍利를 나툰다고 한다. 三世의 여래로 번번이 出世하시는 부처님은 모두 다 열반에 드신 後에 반드시 사리를 남기고 人天의 복업을 이루는 방편을 삼는다. 불멸후 敎와 禪의 宗師로서 불법을 流通하는 사람 중에는 멸후에 사리를 나투는 사람도 있고, 임종의 상은 수승하나 멸후에 사리를 남기지 않는 사람도 있어 그 인연이 헤아리기 어렵다. {寶積經}에 이르기를, "여래의 사리는 無相般若中에서 유출한다. 般若는 사리의 體요, 사리는 般若의 用이라. 愚人은 有相의 사리를 信하고 無相의 般若를 信치 않는다." 고 하였고, 佛光 禪師의 頌에 이르기를, "諸佛과 凡夫는 한 가지 幻이요, 만일 實의 相을 구하면 안중의 티끌이라. 노승의 사리는 천지를 쌌도다. 空山을 향하여 冷灰를 뿌리지 말라. 그러한 즉 멸후에 사리를 나툰 것을 善相이라고는 말하나 이것으로써 반드시 得法한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 때의 {대한불교신문} 4얼 25일자 號外紙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圓寂, 前宗正 東山 大宗師, 祖師 涅槃. 宗團葬' 등의 題下에, "한국불교계의 元老이시며 初代宗正에 추대되고 우리 나라 선찰대본산 범어사의 조실 화상인 東山 大宗師께서 24일 하오 6시 범어사에서 조용히 入寂하셨다. 종단은 前 宗正 동산 대종사의 葬儀를 宗團葬으로 하고 전국의 僧侶와 佛敎徒 및 著名人士를 장의위원으로 한 永訣式을 오는 30일 부산에서 갖기로 했다. 스님은 54년의 法臘을 지니신 享年 76세로 우리 나라 최초의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범어사에 入山하여 龍城 스님을 은사로 得度한 이래 줄곧 한국불교의 향상과 해외교류, 도제양성 및 金剛戒壇의 傳戒師로서 명실공히 한국불교의 主軸이시었다. 특히 한국불교정화를 위하여는 그 先鋒에 섰고, 방금 정화불사의 결실을 앞두고 入寂하시니 宗團은 물론 세계의 불교도들이 哀悼하는 바 크다."라고 하였다.

또 '全國 三千 寺庵 三百萬 信徒 圓寂祈禱法會에 參加'라는 題下에는,

"前 宗正 東山 大宗師의 入寂을 당한 宗團에서는 24일부터 30일까지 圓寂祈禱法會를 실시한다. 이 법회에는 전국의 3千 寺庵에서 전국 僧侶 및 3백만 佛敎徒가 여기 동참하며, 이제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전 종정 동산 대종사의 入寂하심을 追慕하는 齋者인 불자들은 '대종사께서 속히 裟婆에 다시 오셔서 모든 衆生을 濟度해 주시기 바랍니다.'는 뜻의 기도를 한다."라고 쓰고 있다.

1935년, 스님 앞에서 受戒 得度하고 上首 제자가 되어 큰스님의 생애와 열반하실 때의 제반 모습들을 소상히 알고 있는 性徹 스님은 비문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중략…
경자년 이후로는 항상 淸風堂에 머물면서 衲子들을 다루는 용광로는 더욱 뜨겁고, 그들을 편달하는 망치질이 더욱 妙하여, 봉황의 새끼들은 나뭇가지에 가득하고 금빛고기들이 못에 가득하더라. 을사년 봄 金剛戒壇에서 보살계를 설해 마치고 대중들에게 선언하시되 '나는 다시는 이 자리에 오르지 아니하리라'하니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모두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더라. 3월 23일에 이르러 과연 圓寂하시니 천지가 캄캄하고 草木도 슬피 울더라. 스님과 신도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葬禮를 치르니 인파가 三萬이라. 산에 가득하고 계곡에 넘쳐서 슬퍼하는 이들이 수천에 이르더라. 하늘을 가리고 태양을 가리었으니 그 또한 數百年에 未曾有한 일이더라.
歲壽는 76이었고, 法臘은 53이라. 茶毘한 후에 靈骨舍利를 거두어 금정산 남쪽에 비석과 탑을 세워 큰 덕을 나타내었다. 門徒는 수백명이고 檀越은 수만이었다. 가르침을 事습?독실하여 모두 큰 은혜에 젖었으니, 모두가 절집의 棟梁이요, 큰 배의 指南이라. 그러나 큰 법을 비밀히 전한 것은 다른 사람이 옅보지 못하니 이것은 黃檗의 이른바 '道란 마음으로 깨닫는 데 있고 言說에 있지 않다'고 한 까닭이다. 슬프다. 스님의 金玉 같은 아름다운 모습과 철석 같은 마음으로 온 나라를 교화한 것이 40星霜이었다. 부지런히 宗乘을 闡揚하고 정법을 붙들어 세우는 것을 자신의 소임이라 여기고 험악한 산길을 시원하게 개척하고 수많은 폐단을 확연히 소탕하여 祖師의 등불을 蒼海의 깊은 곳에 안치하고 교단을 태산의 견고한 데 두었으니 큰 願力을 타고 온 사람이라고 누가 이르지 않겠는가. …중 략…

스님은 국가적으로는 참으로 변화가 많고 소용돌이가 극심한 시절을 사셨다. 朝鮮의 5백년 세월이 끝날 무렵에 태어나서 21세 때는 韓日合邦이 되고, 일제의 36년 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았고, 다시 6. 25와 4. 19, 그리고 5. 16 軍事政權의 시기를 다 사셨다. 불교적으로는 일제의 殘滓인 외색 대처승들과의 투쟁인 제1차 淨化와 2차 정화를 다 주도하며 정화불사를 모두 성취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제 큰스님은 그와 같은 세월들을 모두 접고 큰 고요 속에 不生不滅의 法身으로 길이 안주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