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14일 禪學院에서 禪風振作과 衲子結束을 爲하여 開催한 朝鮮佛敎 禪宗第一回 首座大會에 參席했다는 기록과 아울러 그 때의 사진이 전한다.
스님께서 범어사 元曉唵에 住錫하고 계시던 때의 일이다. 옛 집터에 땅을 파는 일이 있었다. 二丈쯤 되는 곳에서 홀연히 한 玉印을 발견하였다. 본래는 鐵盒에 담겨 있었는데 철합은 모두 허물어지고 玉印은 상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 玉印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長大敎網 人天之魚 큰가르침의 그물을 펼쳐서 인간과 천상의 고기를 건진다."
스님은 元曉 大師가 사용하시던 玉印임을 確信하고 이를 龍城 스님과 葦滄 先生에게 그 鑑定을 의뢰하였다. 용성스님과 위창 선생 모두가 역시 스님의 의견에 首肯하였다. 華嚴寺刹인 범어사와 元曉대사가 주석하셨던 원효암, 海東 華嚴宗의 初祖이신 元曉대사, 그리고 화엄경의 名句인 張大敎網 등이 모두가 일치하는 것이다. 특히 張大敎網이라는 글귀는 元曉 스님께서 즐겨 읽으셨던 晉本 六十華嚴經 五十八卷 入法界品에 있는 말이다. 奇妙한 인연인 것은 이 寶印이 뒷날 용성 스님께서 東山 스님에게 戒脈과 正法眼藏을 傳授하시면서 그 信標를 삼아 함께 부여한다고 傳戒證에 銘記하고 있다. 물론 "海東初祖所傳"이라는 내용도 함께 기록하고있다. 三祖師가 轉傳相傳하신 衣鉢과 같은 이 寶印을 스님께서는 평소에 매우 좋아하시어 貴重하게 간직하시었다. 물론 지금도 범어사의 寺寶로 잘 보관해 오고 있다. 스님께서는 2년 여 원효암에서 정진하시는 동안 斷食을 하시면서 범어사를 오르내리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 普照 스님의 {看話決疑論}을 暗誦했다고 한다. 그 당시 함께 살았다는 어느 스님의 말에 의하면, 스님께서 {看話決疑論}과 {원돈성불론}을 처음 입수하시고는 愛之重之하시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보여주지도 않았으며,그 무렵 법문을 하실 때면 으레히 {간화결의론}의 내용을 말씀하셨다고 전한다.
스님께서는 이 해 여름에 曉峰 스님, 靑潭 스님과 같이 雪嶽山 峰頂庵에서 여를 安居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 깊은 마음을 아무도 모르게 예나 다름없이 정진에 매진하였던 것이다. 여름 안거를 설악산에서 보내고는 다시 범어사로 내려와서 祖室로서 납자들을 지도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좋은 도반들과 정진에 열중하는 일은 수행자로서는 더 없는 행복이다. 부처님은 成道하신 후에도 說法으로써 중생들을 敎化하는 시간 외에는 언제나 禪定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스님의 保任精進도 또한 계속되었다. 스님은 이 해의 여름 안거를 태백산 정암사에서 曉峰 스님, 惠菴 스님과 함께 지내면서 사찰 경내로 흐르는 계곡물을 잘 정리하여 병자년의 대홍수(丙子水敗)를 무사히 넘겼다는 逸話가 기록에 전하여 오고 있다. 『芳啣錄』에 의하면 태백산에서 여름 안거를 잘 지내고 해인사에 내려와서 조실로 계셨다. 丙子年을 시작으로 다음 해인 丁丑年, 戊寅年, 乙卯年, 庚辰年까지 해인사의 조실로 기록되어 있다.
이 해의 11월 18일은 스님께 있어서 참으로 뜻깊은 날이다. 1930년 41세가 되던 해부터 戒壇에 참석하여 때로는 敎授和尙으로 때로는 摩阿 梨로 활약해 오시다가 드디어 龍城 스님으로부터 東國의 戒脈으로 가장 유명한 智異山 七佛戒脈을 傳受받으신 것이다. 龍城 스님께서 내려주신 그 傳戒證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吾今所傳戒 朝鮮智異山 七佛禪院 大隱和尙 依梵網經 誓受諸佛淨戒 七日祈禱一道祥光注于大隱頂上 親受佛戒後 傳于錦潭律師 傳于梵海律師 傳于草衣律師 傳于禪谷律師 傳至于吾代 將此海東初祖所傳張大敎網 人天之魚之寶印 以爲戒 與正法眼藏正傳之信 慇懃付與東山慧日 汝善自護持 令不斷絶 與如來正法住世無窮
世尊應化 二九六三年 丙子 十一月 十八日
龍城震種 爲證
東山慧日 受持
"내가 지금 전하는 바의 戒 은 조선 지리산 七佛禪院 대은 화상께서 법망경에 의거하여 모든 부처님에게 誓願하여 받은 청정한 계로서, 7일 동안 기도하니 한 줄기의 상서로운 빛이 大隱 和尙의 정수리 위에 내리었다. 그로 인하여 친히 부처님의 계를 받은 뒤에 錦潭 律師에게 전하고, 錦潭 律師가 梵海 律師에게 傳하고, 梵海 律師가 草衣 律師에게 傳하고, 草衣 律師(사실은 梵海 律師와 草衣 律師는 순서가 바뀐 것이다. -편찬자 주)가 禪谷 律師에게 전하였다. 이렇게 傳하여 나의 代에 이르렀으니 이 海東 初組께서 전한 바, 큰 가르침의 그물을 펼쳐서 人·天의 고기를 건진다고 새긴 寶印을 가져 戒脈과 正法眼藏을 바로 전하는 信標를 삼아 慇懃히 東山慧日에게 부여하노니, 그대가 스스로 잘 보호하고 지녀서 하여금 단절됨이 없게 할 것이며, 如來의 正法과 더불어 세상에 머물러서 다함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스님께서는 戒脈과 正法眼藏과 그 信標인 寶印을 전해받은 뒤에는 언제나 傳統戒脈에 의한 戒牒을 수계자들에게 내렸던 것이다. 참고로 1947년에 발행된 계첩에 의하면,
"금강계첩 중앙선원 금강계단 삼가 살피건대 부처님 戒律은 노사나불께서 석가모니불께 전하시고 석가모니불께서 여러 보살께 전하시고 여러 보살이 각기 전하기를 다함이 없어서 온갖 중생들이 다 바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생 바다를 건너서 끝없이 밝고 즐거운 저 언덕에 이르려면 心地法門과 十重大戒와 四十八輕戒를 받아 지키어야 하는 것이요, 특히 出家한 이는 비구계나 비구니계까지 가지어야 한다. 우리 나라에는 慈藏 律師나 眞表 律師 같은 이들이 가끔 계율을 일으키어 오더니 李朝 純祖 때에 大隱 화상이 智異山 東國 第一禪院에서 祈禱하여 상서를 얻어 계율을 받은 뒤에 이것을 金潭 장로에게 전하고 그 다음으로 草衣 律師, 梵海 律師, 禪谷 律師 ,龍城 律師가 대대로 이어 傳하여 東山율사에 이르매 東山 율사가 이제 中央禪院 金剛戒壇에서 菩薩大戒와 具足戒를 전수하니 지극한 마음으로 받들어 가지어 犯하지 말고 부처님慧命을 길이 빛낼지어다. 본단 전계 대화상 東山慧日 갈마아사리 永明慧日 교수아사리 皓月成業 존증아사리 漢巖重遠, 石霜信首, 霜月印煥, 石友普化, 曉峰元明, 仁谷昌洙, 東軒完圭 引禮 道鏡弘烈, 炳吉 세존응화 이천구백 칠십사년(1947) 시월 팔일 수계제자 ○○○ 가짐"이라고 되어 있다.
위의 傳戒證과 戒牒은 東山 스님의 律脈을 나타내는 중요한 證據文獻이다. 한가지 밝혀 둘 것은 위의 계첩은 1947년도의 것이다. 1943년의 行狀에서 자세히 밝혀지겠지만 東山 스님은 智異山 七佛의 瑞相戒脈과 中國의 法源寺 戒法까지 모두 전수받았다. 그런데 중국의 법원사 계법은 永明 스님에게 전해 받았다. 그래서 위의 계첩에는 동산 스님이 傳戒 大和尙이 되고 영명 스님은 갈마아사리가 되어 있다. 영명 스님은 1943년 戒法을 동산 스님에게 傳授한 이후에는 戒壇에 參與하더라도 傳戒和尙으로는 앉지 않았던 것이다. 밖으로는 일본제국이 강제로 占領하고 있던 때라 불교계 역시 대단히 어지러웠다. 사찰령에 의하여 娶妻한 倭色僧들이 불교계를 주도하는 가운데 한편 순수한 修行僧들의 불교를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1934년 12월 5일에 조선불교 중앙禪理參究院(선학원)을 설립하여 참선수행자들의 구심점을 마련한 이래 이 해 36년에는 보다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스님은 이때 禪理參究院에서 개최한 首座大會의 準備委員 禪宗評議員에 被選되었으며 전국에 올바른 불교와 수행자의 모습을 알리는 데 크게 힘을 쏟았다.
지난 해에는 龍城스님으로부터 傳戒證에 明記되어 있는 대로 戒脈과 正法眼藏, 그리고 信標인 寶印을 傳受받고 해인사의 조실로 추대되고 이 해에도 역시 해인사의 조실로 계셨다. 스님은 해인사에서 여름안거를 지내시면서 아래와 같은 偈頌을 남겼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解夏法門 頌曰 伽倻山上 初月生 紅流洞下 水萬里 가야산 상봉에는 달이 처음 떴고 홍류동 계곡에는 물이 만 리나 흐르네. 스님께서는 祖室로 계시면서 衲子들을 提接하시는 데 매우 남다른 데가 있었다. 성품이 仁慈하시어 언제나 새로운 대중이 오면 기쁘게 반기시고, 혹 떠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매양 섭섭해 하시며 만류하셨다. 그래서 살다가 떠날 때는 인사를 드리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리고 常住 하는 대중들의 數도 어느 절보다 많았다. 또 스님은 대중들을 위한 法門은 當代에 第一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음성은 흔히 옥쟁반에 구슬이 굴러가는 소리와 같다고들 하였다. 법문은 {信心銘}과 永嘉 {證道歌}를 가장 많이 말씀하였다. 達磨 스님의 語錄과 蒙山法語도 자주 말씀하시고, 話頭는 으레히 萬法歸一 一歸何處를 권하였다.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歲暮와 정월 초하루에는 반드시 祖師 스님들의 어록을 提唱하시어 解弛하여지기 쉬운 衲子들의 공부를 잡아드리기에 애를 쓰셨다. 스님은 안으로 祖室로서의 衲子들을 지도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지난 해 禪理參究院의 重任을 맡은 이후 8월 3일 선학원에서 있었던 全國禪僧遺敎法會에도 참석하여 불교의 앞날을 염려하는 일에도 적극 同參하였다.
이 해 9월 28일에는 범어사 보제루에서 경남 3본산 종무협의회가 開催 되었다고 전한다.
이 해 2월 24일 은사이신 용성 스님이 법을 전한 지 5년 만에 入寂하셨다. 世壽는 77세, 法臘은 61세였다. 일찍이 육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醫學을 공부하던 스님에게 진리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다. 독립운동으로 3년간의 獄苦를 치를 때 그 옥바라지를 하였고 豁然大悟의 기쁨을 함께하며 法을 전하고 寶印을 신표로 물려주셨던 은사 스님이시다. 스님은 이제 龍城門徒의 首長으로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고 명실공히 어른으로 사셔야 하는 큰 任務를 책임지게 되었다.
스님은 이 해 3월 13일 선학원에서 開催 되었던 高僧法會 (遺敎法會)에서 登壇說法하였다.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잘못된 불교를 바로잡아 조사의 종풍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을 역설하였다. 이때 스님은 {梵網經}을 강설하여 취처승들이 歪曲하고 있는 진정한 大乘戒律이 무엇인가를 크게 천명하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이러한 일들이 인연이 되어 스님은 그 후 정화불사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2년에는 경남 삼본산의 대표들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불교의 이모저모를 면밀히 살펴보시고, 또 그곳의 禪師들과 法擧揚도 나눠보았다. 스님은 조선불교는 도저히 일본불교와 하나가 될 수가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돌아왔다 이번의 계기가 큰스님으로 하여금 정화를 꼭 완수해서 宗風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원력을 세우게 하였다.
스님께서는 1930년 41세 때 처음 계단 일에 참여하시고, 1936년 47세때에는 용성 스님으로부터 七佛禪院의 瑞相戒脈을 傳受받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범어사에서 傳來되어 오던 中國 法源寺의 戒法까지 永明 스님으로부터 傳受받아 이 해 1943년부터는 범어사 금강계단의 檀主가 되어 傳戒和尙으로서 계를 전수하기에 이른 것이다. 참고로 中國 法源寺의 계맥을 잠깐 언급하면, 서기 1892년 朝鮮 高宗 29년(壬辰)에 萬下勝林 스님이 중국 법원사에 가서 戒壇에 參禮하고 昌濤 律師에 依支하여 大小乘戒를 받고 본국으로 돌아온 후 계단을 創設하여 戒法을 傳受하였다. 萬下勝林 律師는 다시 1897년에 범어사의 惺月一全 律師와 통도사의 致益海曇 율사에게 大小乘戒法을 전수하였다. 이때부터 범어사에는 自體的으로 金剛戒壇을 창설하여 대소승계법을 傳受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惺月一全 율사는 一鳳敬念 律師에게 전하고 일붕경념 율사는 雲峰性粹 율사에게 전하고 운봉성수 율사는 永明 율사에게 전하고 영명 율사는 다시 동산 율사에게 전하고 동산 율사는 다기 전전상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 범어사 금강계단의 계맥이다. 계맥의 淵源을 알려주는 범어사 {同戒錄}에 실려 있는 가장 오래된 계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金剛戒壇
朝鮮 慶南禪刹大本山 梵魚寺 金剛戒壇
釋迦世尊이 出現於世하사 爲度衆生하야 演說無量法門이나 要其指歸 인댄 唯因戒生定하고 因定登慧하야 以求至於無上菩提利己라 是則發心 修行者의 不可不先受佛戒하야 以爲之本也라 原律宗컨대 自千華首唱으로 鹿苑再聲이라 於是에 波難는 西宏하고 法正은 東闡하니 兩士에 由玆 廣布하야 成因致果하며 覺世爽民하야 無慙眞修來矣라 佛紀 二千九百十九年에 萬下勝林律師가 入於中國하야 參法源寺戒壇하와 衣昌濤律師하야 受大小戒하야 還歸本國하야 隨所建壇하사 傳授戒法하다 佛紀 二千九百二十四年에 師가 傳之惺月一全律師하니 師가 於本山에 建立金剛戒壇하야 傳授戒法하다 佛紀 二千九百四十八年에 師가 傳之一鳳敬念律師하니 師가 主席本檀하야 傳授戒法에 內有弟子하니 名 字 係 籍이라 於 에 依 禪師하야 祝髮하고 於本年 本月 本日에 參于本壇하야 受戒하다 爲此具牒하야 各給一幀하니 勤修三學하야 勿忘四恩하라 願此功德同實際 普令含靈證菩提
傳戒大和尙
摩阿 梨
敎授阿 梨
尊證阿 梨
佛紀 二千九百 年 月 日 受戒弟子 收執
그리고 또 하나의 참고가 될 만한 『同戒錄』中 一鳳敬念 율사의 서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禪刹大本山 梵魚寺 金剛戒壇 同戒錄 序
대저 戒란 道에 들어가는 요긴한 門이며, 세상을 벗어나는 바른 길이다. 삼세제불이 이 戒를 인하여 열반에 들었으며 歷代祖師가 이 계를 인하여 生死에서 벗어났다. 그래서 오늘날 전계대화상 惺月一全 스님이 선찰대본산 범어사에 금강계단을 개설하여 大小의 戒法을 연속하여 12회나 廣說하였다. 우리 사부대중들은 계단에 동참하고 계법을 같이 받아 좋은 인연을 같이 맺고, 선근을 같이 심으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닌가. 이 수승한 인연을 의지하여 法界含靈들이 다같이 금강세계에 나아서 다 같이 正覺을 이루기 발원하여 同戒錄을 펴내노라.
世尊應化 2949년 壬戌(1922) 解冬日
受戒弟子 沙門一鳳敬念 謹識
世尊應化 2931년 甲辰(1904년) 正月 15일
第1回 金剛戒壇
三和尙
傳戒大和尙 惺月一全
摩阿 梨 睡翁惠允
敎授阿 梨 古鏡琪燁
위의 동계록은 제 1회부터 14회의 내용이 모두 현존한다.
이와 같이 범어사의 戒壇으로는 서기 1904년에 제 1회를 중국의 계법을 이은 惺月 스님이 시작하고, 서기 1943년 35회에 와서 중국의 戒法과 七佛의 戒脈을 함께 이은 東山 스님이 傳戒和尙으로서 戒壇을 주관하시어 1965년 57회까지 23회나 계속하였다. 1943년 계미 8월 9일은 戒師이신 惺月 스님께서 77세를 일기로 입적하신 해이기도 하다. 스님께서는 범어사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수차례 수계법회를 主管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受戒式은 거의가 보살계뿐만 아니라 沙彌, 沙彌尼戒와 比丘, 比丘尼戒까지 모두 說하는 것이 通例였다. 그렇다면 그 많은 세월 동안 사미, 사미니와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들이 스님께 계를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참으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近代 한국불교계의 受戒法會의 功績은 진실로 至大하다 하겠다. 이 해 3월 15일은 범어사에서, 그리고 가을에는 海印寺에 가셔서 大小乘戒를 傳受하였다고 한다.
8월 15일, 日本은 무조건 항복한다는 방송을 하고 우리 나라는 드디어 解放이 되던 해이다. 스님은 그동안 梵魚寺와 海印寺 등지를 오가며 지내다가 범어사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 나라에는 9월 1일 北緯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점령한다는 정책이 발표되고, 종단적으로는 해방과 더불어 큰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8월 17일 曹溪宗 종무원장 李種郁 이하 모든 日帝時의 종단 책임자들은 사임하였다. 그리고 불교혁신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서 9월 22,23일에는 전국승려대회가 개최되어 사찰령과 태고사법과 31본말사법이 폐지되고 조선불교교헌이 중앙총무원과 각도 교무원이 설치되었다. 해방이 되던 해에 우리 나라 불교계는 倭色 불교의 혼탁으로 뒤덮여있었다. 부인을 거느린 僧侶의 수가 1만 2천여 명이었고, 독신 수행승려는 8백여 명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이와 같은 열세 속에서 스님은 숱한 受侮와 苦楚를 겪으면서 오로지 精進으로 일관하면서 參禪衲子들을 지도하였다. 스님은 평소에 "닭이 천 마리면 鳳이 한 마리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누구보다도 많은 弟子들을 받아들이신 것도 어쩌면 이때에 帶妻僧들로부터 겪은 數의 劣勢에서 받은 苦難이 마음에 깊이 남은 탓인 지도 모른다.
6·25 동란이 일어났다. 정부는 대전으로, 다시 부산으로 이전하고 서울은 함락되었다. 이때 부산에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범어사에도 자연히 피난을 온 僧侶들로 붐볐다. 특히 스님은 德이 높으시고 복이 많으신지라 평소에도 사람들을 좋아하시어 參禪만 한다고 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다 받아들였다. 아무리 끼니를 때울 양식이 없어도 전쟁 중에 피난을 온 승려들을 물리칠 스님이 아니었다. 그래서 스님의 會下에 雲集한 衲子들로 인하여 범어사 金魚禪院은 靈山會上의 再現이라 하여 모두들 歡喜하고 稱頌해 마지않았다. 비록 전쟁 중에 모인 대중들이지만 그토록 많은 수행납자들이 한곳에 모여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수행정진한다는 것은 큰스님으로서는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다. "飢寒에 發道心이라"는 옛말이 있듯이 어려운 처지인지라 항상 勇猛精進으로 一貫했다. 그 당시 비구승려로서 이름 있는 분으로서는 범어사를 거쳐가지 않은 분이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다음해에도 또 다음해에도 이어졌다. 結制와 解制가 따로 있을 리도 없었다. 그리고 純宗妃 윤대비가 6·25사변으로 구포에 피난와서 隱居하면서 隨時로 스님을 親見하여 法門을 듣고 많은 慰勞를 받았다고 한다.
많은 수행납자들이 雲集하여 無遮大會가 이어지던 이해 6월 6일 顯忠日에는 政府의 主管으로 범어사에서 全國 軍警合同慰靈祭를 擧行하게 되었다. 이때 범어사 조실로 계시는 스님께서 법주가 되어 거행하여 달라는 정부의 요청이 왔다. 그때 慰靈祭를 지내는 일로 해서 스님은 당시 대통령이던 李承晩과 인연이 이루어 졌다. 10시까지 도착하여 제를 지내겠다고 하고서는 제때에 오지 않자, 스님은 마음이 편치 않으셔서 조실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11시가 넘어서야 대통령이 도착했다. 그런 데다가 중절모를 쓴 채 유엔군사령관과 외국의 외교사절들에게 大雄殿의 부처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하는 것을 보시고는 평소의 성격대로 호통을 쳤다. 그런 스님의 威嚴과 德化가 대통령을 感化시켰고, 뒷날 내무부장관이던 白性郁 박사를 내려보내서 정치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이런 일화들이 범어사에는 심심치 않은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이대통령과의 이러한 인연으로 뒷날 스님이 淨化에 盡力하고 있을 때, 이대통령이 무려 여덟 차례나 "帶妻를 한 倭色僧들은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諭示를 하게 되었고 결국은 비구승측의 勝利로 정화를 끝맺게 되었다. 스님 때문에 참선납자들이 너무 많이 모여 사는 일과 위령제 등 일련의 일로 인하여 事判僧들의 위상이 더욱 낮아지자 이 해 12월에는 梵魚寺의 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事判僧(倭色僧)들이 禪院을 폐쇄하고 스님을 逐出하려는 目的으로 갖은 迫害를 加해 왔다. 그러나 祖室 스님은 혹은 德化로써 혹은 默 對處로써 잘 견디어 내셨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