梵魚寺의 永明 大講伯에게서 大敎料를 修了하신 뒤 범어사 선원에 올라가서 禪定을 닦는 일에 邁進하였다. 일찍이 용성 큰스님으로부터 선정을 익히는 일이 불교수행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배웠다. 그래서 經學을 익히는 한편 꾸준히 병행하여 오던 參禪 工夫를 이제는 全心全力을 다해서 용맹정진에 들어갔던 것이다.
기미년 3월 1일은 우리 민족사에서 참으로 잊지 못할 날이다. 日帝가 우리 나라를 强占하여 그 虐政이 극에 달하던 이 때, 드디어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泰和館에서 獨立宣言書를 낭독하고 서울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독립요구시위가 계속되었다. 이 때에 일어난 獨立運動이 각지에 파급되어 6개월이나 이어졌다. 총 참가자는 136만 명이며, 피살자는 6,670명, 부상자는 14,600명, 옥에 갇힌 이는 54,730명이나 되었다. 이 때 恩師이신 용성 큰스님은 33인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감옥에 갇히었다. 33인은 모두 재판을 받아 實刑이 선고되었다. 용성 큰스님은 그 때 3년형을 받았다. 萬海 韓龍雲 스님 역시 실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東山 스님은 그 때 봉익동 大覺寺와 도봉산 望月寺등에 기거하면서 은사 스님의 옥바라지에 갖은 정성을 다 기울였다. 만해 스님의 上足인 春城 스님도 동산 스님과 같이 스승님의 옥바라지에 함께 傳念하였다. 스님은 춘성 스님과 함께 無常함과 憤慨함에서 밤잠을 잊고 용맹정진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悲嘆과 鬱憤과 勇猛心으로 무장한 스님에게 겨울과 여름이 따로 있을 수 없었고, 밤과 낮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면회 날짜가 돌아오면 세탁한 옷을 들고 서대문 獄中의 스승님을 찾아가서 눈물로 相逢하곤 하였다. 이러한 스님의 생활은 1920년을 넘기고 또 다음 해인 1921년까지 이어졌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어 어느덧 1921년 3월이 되어 은사이신 용성 스님이 出獄하였다. 스님의 옥바라지도 이제 끝을 맺었다. 용성 스님은 감옥에서도 經典의 飜譯을 열심히 하시다가 출옥 후 4월에 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飜譯事業에 착수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신 바가 있어서 지난날 건립해 두었던 서울 봉익동 3번지 대각사에서 大覺敎를 創立하시고, 그 해 9월 22일에는 {心造萬有論}의 저술을 남기셨다. 용성 큰스님은 日人들의 간계에 의하여 1911년 6월 3일 寺刹令이 반포되고 사찰령에 따라 승려들이 차츰 娶妻하는 비율이 높아감에 따라 소위 娶妻僧, 곧 倭色僧과 결별하기 위해서 正統佛敎를 표방하며 大覺敎를 창립한 것이다. 스승님의 옥바라지를 끝낸 스님은 4월 15일 五臺山 上院寺에서 여름 結制에 들어갔다. 온 나라가 그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나라의 獨立은 이루어지지 않고 스승님마저 옥고를 3년이나 치루었으니 그 옥바라지를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憤心이 일어났겠는가? 이러한 상황들이 스님으로 하여금 공부에 더욱 奮發心을 일게 하였던 것이다. 스님은 하안거 동안 줄곧 長坐不臥와 勇猛精進으로 일관하였다. 상원사에서 여름 해제를 한 후 十月 보름에는 金剛山 摩訶衍에서 結制를 하고 三冬安居를 성만하였다.
金剛山 摩訶衍에서 겨울 結制를 마치시고 다시 俗離山 福泉庵으로 옮겨서 夏安居를 하였다. 그리고는 가을에 또 太白山 覺華寺에 오셔서 冬安居를 성만하였다. 세상은 어지럽고 할 일은 많았으나 스님은 오직 精進, 精進만이 그 모든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가슴 속에 굳게 굳게 다지었던 것이다. 이 해 용성 스님은 만주 연길 근처의 明月村과 寧鳳村에 70여 정보의 토지를 매입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한 가족과 日帝의 등쌀에 고향을 빼앗기고 북간도로 이주한 동포들에게 無償으로 경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각교의 교당도 건립하고 {금강경}, {능엄경}, {선문촬요} 등의 번역과 修心正路 탈고 등 경전번역에 특별한 정성을 쏟으셨다. 그로 인하여 불교발전과 國民啓蒙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때는 밖에서도 {白潮}, {新生活}, {時事評論}, {婦人} 誌 등등 많은 문예지와 국민들을 啓蒙하는 잡지들이 속속 창간되어 나라가 당면한 현실에 국민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는 데 모두가 힘을 쏟던 해이다.
계해년 봄 스님은 태백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出家本寺인 범어사로 와서 三月佛事를 참관하고 그리고 이 해 四月 보름에는 咸陽 白雲庵에서 結制에 들어갔다. 용성 스님의 出獄 후 전국의 유명한 선원을 자유롭게 돌면서 마음껏 정진할 수 있게 되었던 스님의 行脚은 오대산 상원사, 금강산 마하연, 속리산 복천암, 태백산 각화사를 거쳐 함양 백운암으로 이어졌다. 스님의 위와 같은 선원에서의 정진은 거의가 勇猛精進으로 일관하였다. 평소의 願力과 時代狀況이 더욱 편안한 정진은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계속되는 용맹정진 중 1924년 4월 28일에는 스승이신 용성 큰스님은 서울 대각사에 주석하고 계셨는데, 이 때 용성 큰스님의 왼쪽 치아에서 舍利一顆가 나와서 불교계에 큰 話題가 되었다. 또 6월 15일에는 {원각경}을 번역 간행하였고, 朴漢永 스님과 월간 {佛日}誌를 창간하여 축하법회, 창간법회로 인하여 제자인 동산 스님이 參與해야 할 일이 많았으나 정진에 마음을 쏟고 있던 때라 서울 근처를 아예 가지 않았다. 정진에 그토록 철저하심과 같이 승려가 된 그날부터 스님의 수행일과는 너무나 철저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禮佛時間이 되면 누구보다도 먼저 法衣를 입고 나오셔서 부엌의 王壇에서부터 시작하여 七星壇, 山神壇에 이르기까지 법당이라는 법당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며, 또한 한 법당 안에서도 각단의 예불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아침과 저녁 그리고 巳時까지 예불에 근행하신 것은 어느 누구도 따를 이가 없었던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일이다. 이와 같이 예불에 철저하신 것은 禪院에서 정진하실 때뿐만 아니라 세계불교도대회에 가셔서도, 그리고 그 바쁜 淨化佛事의 와중에서도 한번도 거르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와 같은 스님의 禮佛하시는 일과는 노년을 맞고 涅槃에 드시던 그날 아침까지 이어졌었다. 스님의 대중생활에서의 또 한가지 기록할 만한 것은 運力이다. 본래 대중생활의 기본은 供養, 禮佛, 運力 이 세 가지에 잘 참여하는데 있다는 것은 佛家의 상식이다. 그러나 스님의 경우는 다르다. 예불이 그렇듯이 운력 또한 너무도 철저하시어 시자들이나 같이 생활하는 道伴들이 힘이 들 정도였다. 매일 아침 마당을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밭을 매거나 채소를 거둬오고 그것을 다듬는 일까지도 참여하신다. 특히 아침에 마당을 쓰는 일은 쓸 것이 있거나 없거나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白丈懷海 스님은 제자들이 운력하는 도구를 감추어 버림으로써 공양을 굶은 사실이 있었다. 그래서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이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겼다. 한데 스님은 마당을 쓰는 빗자루나 기타 호미나 괭이, 낫 같은 운력도구를 감출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 도구들을 수선하고 갈무리하는 일도 스님께서 손수 살피시고 지시하는 까닭이다. 涅槃에 드시던 그날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법당에서 魚山矯까지 쓰시고 가셨다. 마치 먼지를 닦고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 가장 값진 수행이라는 교훈을 남기시기라도 하듯이.
전국의 선원들을 돌면서 한 철씩 정진하시다가 이해 4월 보름부터는 김천 직지사에서 삼년결사를 시작하였다. 일본이 나라를 빼앗아 그들의 식민정책은 날로 심하여 가는 와중에서도 憂國志士들은 각각의 분야에서 나라를 되찾으려는 운동이 활발하여 국민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에 음으로 양으로 큰 활약을 하던 때이다. 스님은 이 어렵고 복잡한 세상사를 가슴에 묻어둔 채 오직 정진에만 아픈 채찍을 무섭게 내려치신 것이다. 黃嶽山 직지사에서의 결사는 다음 해에도 또 다음해에도 계속되었다. 結社란 불도수행의 큰 효과와 목적을 위하여 여러 사람이 합동하여 단체를 結成하고 일정한 시간과 지역을 정하여 행해지는 수행이다. 여기에는 수행하는 데 障碍를 없애기 위해서 특별히 의식주와 시간을 제한하게 된다. 원래는 일정한 장소에 거처하는 것 외에 남은 음식을 간직하여 두지 않은 것과 옷을 벗지 않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스님은 이러한 전통적인 結社法에 의하여 정해진 환경 속에서 마음껏 정진하였으며, 그 때 크게 得力하였다고 한다.